‘해빙기’는 두가지 풀이로 해석된다.

그 하나는 서로 대립 중이던 세력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는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지난번 미북정상회담도 일면 해빙의 기미를 보였으나 합의 무산으로 끝났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으로 해석해야겠다.

정치적인 해빙기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이 얼음이 녹아 풀리는 때다. 이것이 진짜 해빙기다.

3월이 되니 그 매섭던 추위도 물러가고 바야흐로 낭만 가득한 봄이 노크를 한다. 그런데 이 봄을 시샘하는 것이 있다. 해빙기와 안전불감증이라고 하는 것이다. 봄맞이를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기 때문이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녹는 3월에는 토목공사장, 도로변 절개지 등이 무너지는 해빙기 대형 안전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다. 안전점검이 필수다.

봄에 많이 발생하는 안전사고는 산악사고다. 해빙과 함께 나들이도 문이 열린 탓이다.

한겨울 움츠렸다 기지개를 켜며 산을 타는 것은 좋지만 기다렸다는 듯 여기에 사고가 따라 붙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계 주요산에서 산행 중 발생한 산악사고를 분석해 보면 한해 1500건이 넘는다. 마치 사고를 내려 산에 가는 듯하다.

산악사고의 으뜸이 실족추락이다. 부주의와 안전불감증 탓이다. 자살기도, 암벽등반 사고도 만만치 않다.

실족추락사고는 하산할 때 자주 일어난다. 근육에 긴장이 풀리면서 올라갈 때와는 달리 주의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에서 술을 마시고 하산할 경우에는 신체 균형이 깨져 실족위험이 배가 된다.

어디 산악사고 뿐이랴. 봄철은 안전에 유의해야 하는 계절이다.

봄이 왔다고 좋아하지만 우리가 안전불감증 때문에 위험지대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안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은 ‘내가 위험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내게 사고가 없으면 그것이 곧 안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재해석해 보면 뜻이 좀 달라진다.

안전은 탈 없는 것이 아니라 늘 사고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이다. 사전에는 안전이란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는 상태’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경우는 거의 있을 수 없다. 전설에나 나오는 불로장생초를 먹었다거나 불사신의 초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사람이 절대안전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이란 말의 의미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안전이란 ‘언제나 사고나 위험을 부를 수 있는 대기상태’라고.

사람들은 대개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에 안전에 대한 점검을 소홀히 한다. 이 때 안전불감증이 스며드는 것이다.

안전은 그 상태로는 안전이 아니다. 안전은 깨어 있어야 하며 항시 위험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안전’이라면 안전을 생각하기 전에 위험과 재난을 먼저 머리에 떠올려야 한다. 이것이 안전을 일구는 참 개념이다.

그간 안전에 무심했던 자신의 잘못을 되짚어보고 이제 위험과 재해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출사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안전사고는 누가 뭐래도 ‘막을 수 있는’ 사고다. 그럼에도 계속 당해 왔으니 그것이 문제다. 안전사고의 발생과 예방이라는 두 가지 명제는 ‘딜레마, 모순(矛盾)’의 논리와 부합한다.

그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창(矛)과 그 무슨 창으로라도 꿰뚫을 수 없는 방패(盾)가 있다고 치자.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찔러본다면 어찌 될까. 이것이 창과 방패, 즉 모순이다.

그 어떤 노력에도 우리 곁에서는 사고가 터진다. 정녕 막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잘하면 무사고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안전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만큼 또한 보람되고 값진 것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사실 안전의 명제를 숙고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시기와 맞닥뜨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늘 안전에 대한 생각(念)을 지니는 것이 안전을 굳히는 길이요 비결이다. 안전을 생각하는 3월로 새봄을 열자.

얼어붙은 내안의 안전불감증을 녹이는 그런 해빙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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