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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오피니언 기고승인 2019.08.29 16:14 | 수정 2019.08.29 16:28
[기고-강선희] ‘인의예지’ 어디로 갔나강선희 보라매초등학교 한문강사

얼마전 중학생들이 선생님 때리는 내기를 하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뒤통수를 두차례나 때리는 사건이 있었다.

학교측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아무 이유 없이 순전히 장난삼아 내기로 선생님을 폭행했지만 자신들의 내기행위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감히 선생님을 폭행한 학생에게 ‘정학 10일’의 처분을 내렸다.

초·중등교육의 현행법상 10일의 출석정지는 높은 수준의 징계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선생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학생에게 ‘정학 10일’이라니….

선생님의 교육상 체벌에도 학부모들은 교사를 짓밟는 짓을 서슴지 않으니 그 문화에 젖은 아이들은 내기로 선생님을 구타하는 일까지 생긴 것일 게다.

그 선생님은 병가를 냈다고 하는데 그 충격이 어떨지, 그 트라우마를 어찌 극복하실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을 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지(智)라며 사단(四端)을 강조했다.

맹자왈(孟子曰) 수신무분어동서(水信無分於東西) 무분어상하호(無分於上下乎) 인성지선야(人性之善也) 유수지취하야(猶水之就下也) 인무유불선(人無有不善) 수무유불하(水無有不下) 성즉천리(性卽天理) 미유불선자야(未有不善者也).

맹자 왈 “물은 진실로 동서의 분별이 없지만 상하에도 분별이 없겠는가? 사람의 성품이 선함은 물이 아래로 나아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이 없다. 성은 바로 천리(天理)이니 착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

금부수(今夫水) 박이약지(搏而躍之) 가사과상(可使過顙 \) 격이행지가사재산(激而行之可使在山) 시개수지성재(是豈水之性哉) 기세즉연야(其勢卽然也) 인지가(人之可) 사위불선(使爲不善) 기성(其性) 역유시야(亦猶是也).

“지금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이마를 지나게 할 수 있으며 격하게 흘러가게 하면 산에도 있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기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사람이 불선을 하게 함은 그 성품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물이 이마를 넘고 산에 있음은 모두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것인데 그 본성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외부의 힘에 의해 본의 아니게 그 본성을 거슬렀을 뿐인 것이다.

사람은 본래 선하기 때문에 순히 하면 선하지 않음이 없고 본래 악함이 없는데 환경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며 성선(性善)은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디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 그 성선이 밖의 충격에도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 부단하게 노력해야 함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순자의 성악설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 관능적 욕망과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만약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과 욕구를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질서는 혼란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이 있어서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해야 비로소 천하는 질서가 있게 된다.

인성(人性)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해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인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조건에 교육의 효과와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어진 본성을 잃지 않는 것도, 이익을 좋아하고 탐하는 본성을 억제하는 것도, 그 성선(性善)이 이마를 넘고 산에 머물지 않도록 늘 수신하고 탐하는 마음이 발하지 못하도록 예와 법으로 절제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의 환경은 어떠한가?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황금만능주의에 빠지면서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말까지 생겨 났으니 동방예의지국이라던 이 나라가 진흙탕에 빠져 버린 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의 탓인가? 교사 폭행을 장난삼아 ‘내기’의 수단으로 삼은 그 학생과 그들의 부모에게만 있는 걸까?

이는 겸손과 양보는 미덕이 아니고 손해요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선따위는 얼마든지 진흙탕에 버리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사회라는 환경이 인의예지를 짓밟아 버린 탓일 것이다.

2500년전의 공자시대에도, 천년전에도, 필자가 어린 시절에도 당시의 기성세대는 늘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했다.

필자 또한 아직 강단에 서는 입장에서 다행히 사서삼경을 논하다 보니 어린 학생이나 학부모나 성년의 수강생들은 다른 과목의 강사들이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기본적인 예는 갖추고들 있지만 필자 역시 기성세대의 잔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마도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사고를 가진 탓이겠지만 요즘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오는 엄청난 금차지감(今昔之感)의 괴리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겠기에 강단에서 인의예지를 논하는 것이 너무 부끄럽다.   

아, 진정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는 어디로 간 것인가?

강선희 koksh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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