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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오피니언 칼럼승인 2019.07.02 10:29 | 수정 2019.07.02 10:29
[권화섭 칼럼]민주주의와 안전의 가치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

미국의 역사학자이며 사회문명비평가인 크리스토퍼 래시가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 배반’이라는 저서에서 제기한 준엄한 질책이다.

지난 1987년 민주화 혁명 이후 어렵사리 민주정치의 틀을 갖춰 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에 무엇이 잘못됐기에 그러한 추궁을 당해야 하는가?

물론 저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미국인들이고 그 중에서도 미국의 지식인, 전문직 종사자, 언론인 등 이른바 엘리트 계층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또 그가 이 질문을 제기한 시점은 1990년대 전반기로 이제는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미국과 세계정세도 그 당시와 크게 달라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2000년대 첫 20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래시의 그 추궁은 미국사회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한국사회 역시 심각하게 고민하고 응답을 해야만 하는 문제이며 어쩌면 미국에 비해 우리의 상황이 더욱 절박하지 않나 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민주개혁은 과연 살맛나는 미래를 약속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에 접근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서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래시의 일깨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민주주의는 그것이 지닌 온갖 내재적(內在的)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수한 제품, 우수한 예술과 학문, 우수한 성품의 인간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 결과로 판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서 비판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선(善)이 아니며 그 호불호(好不好)는 실재적 성과를 갖고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래시의 이러한 지적에 동의할 경우 우리의 민주화 개혁은 심히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바뀐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군사정권을 밀어내고 문민정부 시대로 진입한 한국정치는 그로부터 10년째인 1997년말에 터진 IMF 외환위기의 충격에 경제적 지속성장의 자신감을 상실하고 사회·정치적 갈등이 나날이 극심해 지고 있는 지극히 실망스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적 담론의 실종

민주주의는 결코 아무런 결함이 없는 완전한 정치체제가 아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매우 열등한 정치체제로 규정했다.

그에게 최선의 정치체제는 ‘철인정치’였지만 이것은 현실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며 그 다음에는 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군왕제, 그리고 복수의 집정관을 두고 있는 ‘집단지도체제’를 민주주의보다 나은 정치체제라고 밝혔다.

왜냐하면 민중이 건전한 시민의식을 잊어버리고 권력자의 선심정치(populism)에 귀가 솔깃해지면 쉽사리 혼란과 갈등에 빠져들고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포퓰리즘으로 변질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친미와 반미 등 이분법적 대립과 원색적인 막말 수준의 논쟁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냉소와 갈등이 만연하면서 사실상 ‘의미 있는 담론’이 사라져버린 상태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에서는 뉴스가 홍수를 이루지만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구미에 맞는 뉴스와 가십성 기사에만 눈길을 준다. 민주적 담론의 중심이 돼야 할 국회마저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는커녕 한탄과 우려를 자아내는 극단적 대결과 정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모임에서 진지한 대화나 논의를 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그저 생활 주변의 얘기나 우스갯말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당연시하게 됐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는 다툴 일이 없으니 그러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간에는 어차피 이성적인 논의가 될 수 없으니 아예 진지한 화제는 꺼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래시가 ‘민주적 시민의식’의 특징으로 꼽는 ‘자조, 책임감, 솔선’의 덕성(德性)을 지닌 민주적 시민의 모임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처럼 활기 없고 멍때리는 좀비(zombie) 시민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타락시켜 끝내는 난폭한 독재자의 압제에 떨어지게 만들게 된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민주적 담론이 끊긴 나라는 결코 민주적 나라가 될 수 없다.

한국에서 오랜기간 활동해 온 한 외국인 기자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심이 곧 민주주의’라는 믿음이 너무나 강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수백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했고 시스템은 그에 응답했다. ‘공화국(republic)’은 제도에 의한 통치를 뜻하는데 한국식 사고에서는 민중이 통치자다. 그건 혼돈이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민심’에 의해 살해당했다. ‘민심’이라는 아이디어는 굉장히 위험하다(Michael Breen, 한국 한국인, 2018, p.416).”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

한국의 정치인들은 모두가 민심의 충복들이다. 그들은 명분과 논리에서 밀리면 곧장 민심을 끌어내어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제약을 뛰어넘어 히틀러의 아류(亞流)로 내달린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민주정치의 본질은 다수의 절대주권에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수의 독재’를 십분 경계했다.

다수의 독재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이 국민투표나 다른 대중 동원방식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약하는 헌법과 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며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계 미국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민주주의는 번성하고 있지만 자유주의는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을 ‘비(非)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The Future of Freedom·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2003).

자카리아가 말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대표적 인물은 바로 히틀러다.

그는 “지난 수십년간 개발도상국에서 진행된 민주주의의 경험은 다수 의석을 점유한 세력이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매우 소란스럽게 권력분립 원칙을 잠식하고 인권을 교묘히 유리하며 관용과 공정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을 타락시키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항상 자유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유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한 국가나 기업의 번영과 쇠퇴는 그 구성원이 스스로를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신뢰와 협력의 형태를 따른다면 번영을 기대할 수 있고 그와 반대로 불신과 갈등의 형태로 이뤄지면 쇠퇴의 내리막길을 달리게 된다.

한국의 정치권은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개혁과 발전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철저히 제로섬 게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민주주의가 단순히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넘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라는 래시의 추궁까지 생각할 때 민주주의와 온전한 안전의 가치도 살려야 할 것이다.

권화섭 hwasup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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