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섬유 파괴 ‘다발성 경화증’… “업무-발병 상당인과관계” 대법 첫 판단

대법원이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며 얻은 희귀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며 노동자가 낸 소송에서 하급심 판결을 깨고 근로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대법원까지 올라온 삼성전자 반도체·LCD 노동자의 산재 사건 중에서 업무와 질병 발생·악화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첫 사례다. 대법원은 삼성이나 노동청이 ‘업무상 비밀’이라며 유해화학물질 자료 제출에 소극적인 점도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황으로 봤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9일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사업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한 이모(33)씨가 낸 요양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씨 패소로 판결한 1·2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씨는 18세였던 2002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LCD 패널 화질검사 업무를 맡았다. 4조3교대 혹은 3조2교대로 출근해 눈으로 패널 화면의 색상과 패턴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하루 12시간 이상 전자파를 쐬고 ‘이소프로필알코올’이란 화학물질에도 노출됐다. 그에게는 2003년부터 아토피성 결막염과 자율신경 기능 장애가 찾아왔다. 이어 원인 불명의 가슴 통증과 관절증도 앓게 됐다.

2007년 퇴사한 이씨는 이듬해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신경섬유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과 장기가 마비되는 불치병으로 정확한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자외선 노출 부족, 스트레스, 유기용제(다른 물질을 녹이는 액체) 취급, 흡연 등과는 일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이씨는 2011년 자신의 병을 산재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냈다.

1심은 “이씨가 업무로 인해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했거나 자연 경과적 진행 속도 이상으로 악화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심리 3년 만에 이씨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씨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업무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수 있지만 다발성 경화증 발병으로 이어질 정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2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씨의 발병·악화는 업무와 상당(타당)인과관계(타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가 인정될 여지가 크다”며 이씨 승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이씨는 입사 전 건강 이상이나 가족력 등이 없었는데도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근무하던 중 평균 발병연령 38세보다 훨씬 이른 21세 무렵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기용제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업무 스트레스 등 질환을 촉발하는 요인이 다수 중첩될 경우 발병 또는 악화에 복합적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삼성 측이 외부에 의뢰한 역학조사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었고, 사업주와 관련 행정청이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정보가 영업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해 원고의 입증이 곤란해진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므로, 이를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유해화학물질에 상시 노출되는 근로자에게는 현대 의학으로 정확히 알 수 없는 희귀질환이 발병해도 전향적으로 업무 연계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산재 피해자·유가족 모임인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접수된 삼성전자 ‘다발성 경화증’ 발생자는 현재까지 4명으로 대부분 산재를 인정받았다.

LCD·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일한 2명은 올해 5월과 7월 각각 승소 판결이 확정됐다. 나머지 1명은 현재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 재해 여부를 심사 중이다.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LCD 생산라인 노동자에게 발생한 백혈병, 유방암, 뇌종양, 난소암, 재생불량성 빈혈, 다발성 신경병증, 다발성 경화증, 악성림프종 등이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됐다. 하이닉스 등 관련 업체까지 합하면 모두 21명이다.

반올림 이종란 상임활동가(노무사)는 “노동자에게 증명 책임을 돌리는 잘못된 법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 판결”이라며 “삼성전자도 공장 노동자의 업무 여건을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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